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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잡

미래 잡(JOB)
미래 금융경제를 이끌 ‘핀테크 전문가’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첨단 정보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4차 산업혁명은 경제·금융 시스템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제 금융에 기술력이 더해져서 모바일에서 모든 거래를 통제하고 실행할 수 있는 혁신이 진행 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금융 산업의 역사 속에서 관련 직업들은 어떤 변화를 겪어왔을까? 187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인 제일은행이 부산에 생긴 이후, 보험과 증권 등 새로운 금융 서비스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시대를 망라하고 금융권 종사자들의 공통점은 상당히 높은 인기를 얻었던 직업 중 하나라는 점이다. 기술 혁신의 리더로 인정받는 핀테크 전문가부터 과거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을 책임져왔던 직업들도 함께 소개한다.
핀테크 전문가

핀테크 전문가란?

핀테크란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을 결합한 합성어로 핀테크 전문가는 IT기술과 금융을 연계하여 금융 거래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거래 시스템 개발 및 정보 보안 등의 일을 맡는 사람들을 말한다.

은행 대신 집에서! 모바일 금융의 리더

핀테크 전문가는 금융 서비스를 더욱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연구한다. 대출, 결제, 저축, 보험 가입, 투자(주식, 펀드) 등 다양한 업무를 금융기관 방문 없이 스마트폰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하며, 이 외 기부, 납세 등 부가적인 금융 서비스도 모바일을 통해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은행 대신 집에서! 모바일 금융의 리더

결제를 더욱 간단하게! ‘OO 페이‘ IT 산업

핀테크 전문가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금융 거래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든다. 요즘은 계산대에서 카드 대신 스마트폰으로 결제가 이뤄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국내에서도 여러 지자체나 기업들의 이름이 붙은 ’OO 페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자유자재로 결제가 가능해졌다.
↑ 스마트폰으로 자유자재로 결제가 가능해졌다.
차량 단말기를 통해 편리하게 결제 진행이 가능해진다.
↑ 차량 단말기를 통해 편리하게 결제 진행이 가능해진다.

최근에는 자동차에서 비대면으로도 편리한 결제가 가능하다. 운전 중 내비게이션 화면 터치만으로 주유소, 주차장 등 다양한 곳에서 결제가 가능하다

은행 대신 집에서! 기술을 활용한 금융보안 전문가

핀테크 전문가는 해킹과 같은 금융 사고를 방지하는 일도 한다. 금융 서비스가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만큼 보안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거래 기록을 하나의 서버가 아닌 여러 곳으로 나눠 저장하는 ‘블록체인’이나 지문, 얼굴과 같은 생체인식 기술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한 인증서비스들이 점차 도입되고 있다. 지난 5월, 전자서명법 개정으로 공인인증서의 법적 효력이 다른 인증서들과 동일해져 다양한 전자서명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있어, 이와 관련된 보안 서비스 분야가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은행 대신 집에서! 모바일 산업

실제로 많은 현대인들이 대출, 결제, 저축, 보험 가입, 투자(주식, 펀드)등 다양한 업무를 금융기관 방문없이 스마트폰의 앱으로 해결하고 있으며 서비스는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향후 블록체인 기술과 자동차 산업과의 연계 등 다양한 방식으로의 혁명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핀테크 전문가의 역할과 관련 직종도 다각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60년대

1960년대는 경제적인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주도하에 적극적인 경제개발전략을 추진하던 시기이다. 국내에 축적된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정부는 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부족한 자본을 동원하고 이를 전략산업에 집중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금융산업에 크게 의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1960년대 서울상업은행 [출처:은행연합회]
↑ 1960년대 서울상업은행
[출처:은행연합회]
1970년대 은행 창구 모습[출처: 영남일보]
↑ 1970년대 은행 창구 모습
[출처: 영남일보]

꿈의 직업 은행원

고도 성장기인 1960~1970년대 금리정책의 초점은 주로 물가 안정에 맞춰져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5년 9월 30일의 ‘금리 현실화’ 조치다.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를 기존 연 15%에서 무려 30%로 단숨에 올린 이 전무후무한 조치는 물가 상승을 막아 서민 경제의 파탄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덕분에 은행에는 돈이 몰렸고 은행에서 일하는 은행원은 꿈의 직장이자, 최고의 결혼상대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인생 역전이 될 수 있는 은행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1970년대 은행 창구 모습[출처: 영남일보]

1980년대

1980년대에 들어 금융자율화 및 개방화가 추진됐다. 이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과거 금융 억압에 따른 자원배분의 왜곡 등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자율화에 대한 필요성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외로의 사업 확장을 시도하는 미국 등 해외 선진국가들의 금융자율화 및 개방 압력도 시작됐다. 상징적으로 은행의 자율경영을 유도하기 위한 은행법 개정으로 시중은행의 민영화가 추진됐다. 국내 금융기관의 대형화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증자 및 점포 확대 등의 자율화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1971년대 말굽형 포스트에서 이뤄진 주식 매매 현장[출처 : 한국거래소]
↑ 1971년대 말굽형 포스트에서 이뤄진 주식 매매 현장[출처 : 한국거래소]
1979년 전자시세게시판을 테스트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한국증권거래소(코스콤) 직원들 [출처:코스콤]
↑ 1979년 전자시세 게시판을 테스트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한국증권거래소(코스콤) 직원들 [출처:코스콤]

증권 금융인

주식시장의 활황으로 주식거래량이 증가하면서 1987년 전산매매가 도입됐고 본격적인 활성화가 시작됐다. 서울은 물론 지방 소도시까지 주식의 인기가 확산되어 증권사도 은행처럼 지방 도시에도 지사를 세웠다. 주식투자 인구가 400만 명을 넘어서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증권사의 성장에 힘 입은 증권주의 상승률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였다. 이런 이유로 증권회사 주식을 사주로 가지고 있던 증권사 직원들은 자산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당시 증권사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은 혼수품으로 아파트 한 채는 기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어 증권사는 최고의 인기 직장으로 떠올랐다. 명문대 상경대 출신들의 로망이 주요 증권사에 취업하는 것이기도했다.

2000년대

금융기술의 발전과 금융규제완화 추세로 국가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국제간 금융거래의 자유화가 크게 진척됐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금융서비스 공급자의 출현이 촉진 되고 국내와 국제 금융시장 간의 연계성이 증가하면서 금융의 범세계화(globalization) 현상이 가속화됐다. 또한 새로운 수익원 개발을 위해 국제적 분산투자의 확대, 조세 목적의 차익거래 증가, 외환 및 파생금융상품 거래의 급격한 증가 등에 따라 국제금융거래 규모도 크게 증가했다.

2000년대 증권사 객장 모습[출처: 충북일보]
↑ 2000년대 증권사 객장 모습
[출처: 충북일보]
근무 중인 펀드매니저들[출처: 연합뉴스]
↑ ↑근무 중인 펀드매니저들
[출처: 연합뉴스]

투자 전문가 펀드매니저

펀드는 여러 사람들의 돈을 모아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펀드매니저는 펀드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한다. 펀드매니저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모은 투자금을 수익이 날만 한 곳에 투자하고, 이에 따라 발생한 수익과 손실은 투자자들이 모두 나누어 갖게 된다.

편드매니저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코스피가 1,000선을 돌파한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균나이 39.1세. 대기업 직원보다 높은 연봉. 전도유망한 직업군 중 하나였다. 2000년 초반, 펀드매니저는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종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는 달리 수익률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웃어야 하는 업무 스트레스가 가장 높은 직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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