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민의 의무를 다하며 충실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다. 늙고 병든 그는 사회보장제도를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재정을 써서 부양해야 하는 짐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묻는다. 수당과 보조금을 받기 위해 과연 시민들은 굴욕을 견뎌내야 하는 거냐고.
심장병이 악화된 블레이크는 주치의로부터 일을 그만둘 것을 권고받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라 당장 생계가 어렵다.
그의 나이는 59세. 연금을 받으려면 몇 년은 더 일해야 한다. 질병수당이 유일한 기대소득이다.
질병수당 수급 여부를 판단하는 상담사는 매뉴얼대로 그에게 묻는다.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느냐고. 사지가 멀쩡하다면 질병수당을 받을 수 없다. 실직당했으니 구직수당은 받을 수 있을까. 이 또한 쉽지 않다. 상담 예약은 인터넷으로만 가능하다. 서류신청은 안 된다.
평생을 컴퓨터와 동떨어져 지낸 세대에게 온라인은 어렵다.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인증하는 일조차 난해하다. 계속된 에러에 속을 태우지만, 도와주는 서비스는 없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의무적으로 취업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구직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늪에 빠진 느낌이에요
싱글맘에게도 구직수당은 멀다. 두 아이 엄마인 케이트는 직원과의 약속에서 몇분 늦었다는 이유로 수당심사에서 탈락한다. 두 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익숙하지 않은 길을 어렵게 물어서 왔다는 해명은 고려되지 않는다. 블레이크와 케이트는 심적으로 서로를 의지하지만, 주머니가 텅 빈 현실 앞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케이트는 끝내 몸을 팔고, 블레이크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
영국 복지제도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제조업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영국 경제는 무너지고 복지 부담에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강한 노조와 복지 의존으로 활기를 잃어가는 영국의 상황을 사람들은 ‘영국병’이라고 진단했다. 누군가는 손을 대야 할 때 철의 여인이 나타났다. 1979년 총선거에서 승리한 보수당은 대처를 총리로 내세웠다.
대처의 처방은 복지축소를 통한 지출 삭감, 공공부문 민영화, 노동조합규제, 감세, 규제 완화 등이었다. 이른바 ‘대처리즘’이다. 미국에서도 레이건 행정부가 작은정부를 추구하면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 바람이 세계를 휩쓴다. 대처의 처방은 빛을 발한다. 초기 마이너스였던 영국의 성장률은 그녀의 11년 재임 기간 동안 연평균 6.6% 성장으로 반전된다.
하지만 대처리즘은 그림자도 깊었다. 민영화 과정에서 실업자가 급증하며 실업률이 3배나 뛰었다. 축소된 복지제도로 빈곤층이 빠르게 확산됐다. 빈부격차는 커졌고, 또 다른 사회적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시민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빠져들었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도 심해졌다. 대처 집권 시절 10대를 보낸 영국인들은 ‘대처세대’ 혹은 ‘대처의 아이들’이라 부르며 자조했다.
수당을 받지 못하자 블레이크는 갖고 있는 가구를 하나씩 내다 판다. 블레이크가 노후에 빈곤하게 된 데는 의료비 지출이 있다. 아내 몰리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다. 늘어나는 치료비와 간병비 부담에 블레이크는 노후를 준비할 수 없었다. 생애주기가설을 보면 나이가 들수록 소득은 줄어들고, 의료비 지출은 늘어난다. 건강보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은퇴자의 삶은 빠르게 악화된다. 이는 비단 영국 노인의 사례가 아니다.
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1’을 보면 한국 노인들의 상대적 소득 빈곤율은 43.4%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OECD 평균(13.1%)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높다.
상대적 빈곤율이란 중위소득의 50% 이하인 소득자의 비율을 말한다. 중위소득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웠을 때 중간이 되는 소득이다. 그러니까 노인 10명 중 4명은 중간 소득을 버는 사람의 절반도 못 벌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일군 한국 노인세대가 궁핍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노인세대는 노후를 준비할 기회가 특히 없었다. 젊어서는 가족부양에, 늙어서는 자신의 의료비에 많은 돈을 썼다. 그러다 은퇴로 소득이 끊기면 곧바로 적자 상태에 빠진다.
고령자들이 받는 연금은 공적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통상 3중 구조로 구성된다. 공적연금의 대표는 국민연금이다. 한국은 국민연금 수령액이 적은 편인데 이는 도입 시기가 늦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1988년에 도입됐다. 영국(1908년), 미국(1935년), 일본(1944년)에 비해 시작이 훨씬 늦다. 가입기간이 적다 보니 수령액이 적다. 퇴직연금과 개인연금도 활성화된 게 얼마 되지 않아 가입자도 적고, 가입기간도 짧다.
다만 다행인 것은 국민연금제도가 성숙해지면서 연급수급자가 늘고 연금지급액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수급자는 2012년 331만 명에서 2022년에는 637만 명으로 2배 늘었다.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자의 평균연금월액도 2020년 상반기 53만 6000원에서 2022년 11월에는 58만 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월평균 98만 원을 받는 20년 이상 가입한 수급자가 126만 명으로 2016년(40만 명)보다 3배 증가하는 등 고액 수령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정부의 각종 세제지원 속에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가입자가 빠르게 증가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참여연대의 발표에 따르면 퇴직연금은 5년 전보다 102%, 개인연금은 25% 증가했다. 국민연금이 기초가 되고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 뒤받치면서 조만간 은퇴를 맞는 386세대는 연금을 통한 이전소득이 이전세대보다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블레이크의 자존감은 가난 앞에서 번번이 무너진다.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며 수당을 받아야 하는 삶은 고됐다. 정부 당국과 지루한 싸움을 벌이던 블레이크는 질병수당 심사 항고를 앞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빈약한 복지가 충실한 한 시민을 허무한 죽음으로 내몬 꼴이 된 것이다. 케이트는 블레이크의 장례식에서 “국가가 너무 빨리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라고 절규한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블레이크가 질병수당 심사 항고에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낭독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는 끝내 낭독하지 못한다.
블레이크처럼 연금 가입기간 중 장애를 입어 근로능력을 상실한다면 국민연금은 장애연금을 지급한다. 초진일을 기준으로, 연금보험료를 10년 이상 냈거나 연금보험료를 낸 기간이 가입대상기간의 3분의 1이상 납부했거나 지난 최근 5년 이내 3년 이상 납부된 경우로 가입자 본인과 가족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노후 소득보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고령자가 자존감을 높이고 건강하고 인간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노후 연금은 필수적이다. 국민연금은 세계에서 가장 늦게 시작한 연금 중 하나지만, 고성장과 증가하는 생산인구, 안정적 운영성과 덕에 짧은 시간 내 세계에서 가장 큰 연기금 중 하나로 성장했다. 국민연금기금에는 우리나라 GDP의 50%가량 되는 916조 원(2023년 1월말 기준)이 기금으로 적립돼 있다. 향후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질 든든한 종잣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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