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1년. 지구는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있다. 지구온난화를 막겠다며 인류가 공동으로 살포한 화학물질 CW-7이 지구에 빙하기를 불러왔다.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 열차 한 대다. 이 열차는 지구를 홀로 돌며 17년째 운행하고 있다. 열차는 머리칸, 중간칸, 꼬리칸으로 구성돼 있다. 꼬리칸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댄다. 중간칸은 안정된 삶을 누리는 중산층들이, 머리칸은 향락과 여유를 즐기는 부자들이 살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세계는 평등하지 않다. 열차의 각 칸에는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나뉘어 산다. 칸과 칸사이 이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방탄모를 쓰고 방탄복을 입은 무장한 군인들이 가로막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는 프랑스 만화가 원작이지만 그 세계관을 가져왔을 뿐 스토리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
영화 속 주인공 커티스는 마블 시리즈에서 캡틴아메라카 역을 맡았던 크리스 에반스다. 봉준호 감독이 만든 첫 번째 영어 대사 영화다.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
추위와 허기, 폭력에 시달리는 꼬리칸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사람을 잡아먹어야 할 정도다. 참다못한 커티스는 폭동을 준비한다. 열차의 심장인 엔진칸을 장악해 꼬리칸을 해방하겠단다. 엔진칸에는 열차를 제작한 신 같은 존재, 윌포드가 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폭동이 있었지만 모두 진압됐다. 커티스는 분노를 억누르며 기회를 노린다. 갑작스러운 야간 점호 날, 반란이 들통날 위험에 처하자 커티스는 거사를 일으킨다.
커티스는 열차의 보안장치를 설계하고 만든 남궁민수(송강호 분)를 앞세워 차례로 다음 열차의 문을 연다. 유혈진압에 나선 무장 병력을 물리치며 앞칸으로 나서는 커티스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린다. 알고 보니 이 열차에는 창고 같은 꼬리칸만 있는 게 아니라 아쿠아리움, 학교, 수영장, 사우나, 사교클럽도 있다. 천신만고 끝에 엔진칸 앞에 이른 커티스는 남궁민수에게 엔진칸의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다.
애초에 꼬리칸 탑승자들은 추위를 피해 무임승차를 했다. 열차에 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혁명을 일으킨다. 이들을 혁명으로 이끈 힘은 지독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었다. 꼬리칸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먹을거리는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양갱 하루에 하나. 씻을 물도, 입을 옷도 제대로 없다. 이들은 소와 돼지, 닭은 멸종됐다고 믿고 있다. 이들에게는 계층 사다리도 작동하지 않는다. 엔진칸과 중간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
앤드류는 무장한 병력이 아들을 뺏어가자 신발을 던지며 저항한다. 총리 메이슨은 그에게 오른쪽 팔을 떼는 형벌을 내리며 말한다.
“우리의 보금자리인 이 열차에서 살인적인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옷, 벽? 아니 질서다. 질서적으로 얼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다. 각자 정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신발을 머리에 쓰는 사람을 봤나? 신발은 발에, 모자는 머리에. 너희는 발. 나는 머리다.”
희망이 없는 삶. 자존감을 잃은 삶. 인간은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마침내 커티스는 봉기한다.
인류사를 뒤흔든 혁명은 민중들이 살기 어려울 때 일어났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은 때로 사회를 전복시키는 힘이 됐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해줬지만, 그 때문에 엄청난 불평등이 생겨났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제대로 꿰뚫어 봤다. 자본주의는 발달할수록 그 자체의 모순, 즉 불평등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그는 예언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빈부격차에 지친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흠모하며 조직되기 시작했다. 기존 질서가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자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묘수를 냈다. 그게 건강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으로 대표되는 사회복지제도의 시작이다.
독일 통일을 이끈 비스마르크는 빠른 산업화와 전쟁으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진 노동자의 불만에 맞닥뜨렸다. 이들 노동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며 급속히 힘을 확장했다.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단체 모두를 불법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연금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를 달랬다. 의료보험은 1883년, 산재보험은 1884년, 연금보험은 1889년 각각 도입됐다. 연금보험에는 16세 이상 공장근로자와 연간소득 2,000마르크 이하의 사무직 근로자가 모두 가입해야 했고, 가입 기간이 30년 이상 된 가입자가 70세 되던 때부터 연금이 지급됐다. 1912년에는 유족연금도 도입됐다.
사회복지제도 도입을 미루던 미국이 결단을 내린 것은 1930년대 대공황 때였다. 경제질서가 붕괴하며 극빈자가 양산되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는 뉴딜정책과 함께 연금제도 확대, 최저임금 도입 등을 꺼내 들었다.
과거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임무였다면 현대국가는 빈곤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책무가 됐다. 우리나라도 헌법 112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한국은 이런 헌법정신에 기초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할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
애초에 정해진 자리는 없다
마침내 만난 윌포드를 만난 커티스. 여기서 반전이 있다. 윌포드가 말한다.
“자네의 반란은 내가 기획한 것이었어”
열차는 폐쇄된 생태계다. 공기, 물, 음식 모두 한정돼 있다. 자연 상태에서 열차의 인구수는 빠르게 증가하는데 이대로 두면 모두 굶어 죽는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열차의 인구수를 줄여야 하는데 윌포드가 택한 방법이 폭동이다. 폭동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인구수가 줄어든다. ‘커티스의 반란’의 목표는 꼬리칸 인구의 74%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윌포드는 말한다. “열차 운행 18주년을 맞이해서 18명은 더 살려주지”
영화 [설국열차]는 다양한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열린’ 텍스트다. 멜더스의 인구론을 비롯해 마르크스의 계급론, 막스베버의 다원론, 생태주의, 파시즘, 다위니즘이 모두 섞여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칸들. 그게 모여 뭐가 되지? 기차야. 그리고 정해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확한 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뭐가 될까? 인류야. 기차는 세계고, 우리는 인류 그 자체야” 윌포드의 말처럼 설국열차를 확장하면 인류가 된다.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태양계라는 무한궤도를 도는 지구라는 열차 안에는 칸막이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산다. 이 열차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칸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는 것이 필요하다. ‘천부인권’을 기본으로 하는 현대 시민사회에서 ‘애초에 정해진 자리’란 없다.
설국열차는 끝내 궤도를 이탈하는 파국을 맞는다. 꼬리칸의 사람들에게도 닭고기와 소고기가 지급되고, 각 칸의 이동을 허용했더라면 커티스의 혁명은 없었을 수도 있다.
영화 [설국열차]를 통해 불평등과 복지제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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